어린 시절 추리 소설이나 문학소설을 참 좋아했다.
20대 시절은 자기계발서의 책을 아주 좋아했다.
뭔가 도전해야 할 것 같고, 큰 꿈을 한두개는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시기였던 이유로 허구의 이야기를 읽는 다는게 불필요 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가끔씩 로맨스소설 등과 같은 해피엔딩의 이야기를 읽어 보기는 했지만....
삶의 애환이 들어 가 있는 소설을 읽는 것을 기피하게 된 것 같다. 실제 삶 속에도 복잡하고 힘든 많은 일들이 있는데 소설로 그 복잡함에
하나를 더 얹고 싶지 않았다는게 소설 읽기를 기피하게 된 이유인 듯 하다. 영화도 해피엔딩이 아니면 안 보려는 경향이 있다. 아니 안본다.
진짜 리얼 세상속에서도 소설 같은 이야기 들이 많은데 책까지 그런 류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게 나에게는 불편했고, 상상 속에서 만이라도
행복한 이야기를 읽고 싶은 마음이였던 것 같다.
소설에 물론 해피엔딩의 이야기 들이 많다. 하지만 인기 있는 소설 책일 수록 현실 보다 더 혹독한 삶의 이야기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게 읽은 몇권의 소설책으로 단정지어 버리게 된 것 같다.
이 책은 한참 사춘기의 시간을 보내는 딸로 인해 읽게 되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면 공동의 관심사가 있어야 했고, 자기가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읽기 시작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딸과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가기 위해서는 읽어야 만 했다.
속으로는 '아~~ 소설 읽기 싫은데...' 하면서...
딸이 중간중간 읽다가 나에게 책 내용을 말해 줄때는 귓등으로 듣다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집콕 하고 있는 이때, 책이라도 많이 읽는 시간으로
활용하자고 생각했다.
쌓아두고 읽기 못한 책들이 많아서 그래도 소설은 빨리 읽을 수 있을 듯 해서 먼저 손에 잡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루만에 읽었다 는 아니다. 쭈욱 정독을 해야 하는데 여러가지 일로 몇칠을 걸쳐 다 읽게 되었다.
나름의 후기를 작성해 보면,
먼저 주제가 참 신선(?) 했다. 65세 여자 킬러(방역업자)로 살아가는 '조각'이라는 여자의 삶을 다룬 내용이다.
한국에서 여자 킬러라는 것도 생소한데 나이가 든 여자 킬러라니..
그리고 작가분 성함이 구병모씨라고 해서 당연히 난 보통(?) 한국 사람이므로 남자인 줄 알았다. 내가 나중에 찾아보다가
여자라는 사실에 놀라서 딸에게 얘기했더니... "엄마!! 내가 전에 얘기 했잖아" 란다... 그래 내가 귓등으로 들었다.
작가가 여자분이라는 걸 알아서 인가.. 문장이 아주 섬세하고 자세히 표현해서 일까? 한번 읽고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썼다라는 생각이 그래서인가(여성분이라서?) 라는 생각을 했다.
상황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문장 하나가 상당히 길었다.
'힘들여 문지른 끝에 얼추 원래 색깔과 비슷해진 반지를 손가락에 껴보니 언니 넷째 손가락에 들어갔던 게
자기 들째 손가락에도 헐거웠지만 욕실 백열전구 아래 손을 들어 보며 잠깐 황홀해지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 황홀경은
자기에게는 무의미한 반지보다는 욕실 안을 가득 채운 럭키치약과 코티비누의 냄새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게 한 문장이라는 사실....
초반에는 읽어도 무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같은 문장을 여러번 읽고서야 이해했다.
원래 소설책들 자체가 한 문장이 이렇게 길게 표현하는게 일반적이였던가? 자기 계발서 책들의 간결한 문장에 익숙해져서 일까?
초반에는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중반 이후에 강박사를 만나는 시점부터 이야기가 점차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자신이 살해했던 사람의 아들(투우)이 같은 회사의 킬러(방역업자)로 들어오고,그가 '조각' 에 대한 보복을 시작하면서
내 마음에 이 소설의 결말이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읽어가는 도중에 딸에게 '조각이 죽니?' 라고 묻고 '아니'라는 딸의 대답에 안심해 가면서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투우가 강박사의 딸을 납치해서 조작을 유인해 가는 과정을 읽다가 참지 못하고 또 딸에게 달려가
'강박사 딸 죽어? 진짜 조각 안 죽어?'라고 물어보았다.
딸이 '그냥 읽으시고 결말을 보세요. 둘다 죽지는 않는다고....'
그 말에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마침내 마지막 장을 다 읽어 내려갔다. 이제는 편안하다.
나는 투우의 죽음앞에서 조각이 무심코 중얼거린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냐." 라는 말에 울컷했다.
마지막 부분에 한손의 손톱 손질을 받은 조각이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손톱작품을 마음에 들어하는 장면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역시 어떻게 됐든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거구나..조각도 그렇게 살아가는 구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여서 그런것인가? 마지막은 간결한 문장으로 막을 내렸다.
'지금이야 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글로 표현하지 않은 등장인물의 감정,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 들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강박사와 그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각은 어떤 삶으로 살아갈까? 이제는 킬러의 일을 그만 두었겠지? 등등
거기에 이 책은 책 제목을 왜 '파과'라고 했을까 라는 궁금증도 더하게 되었다.
동일한 의미의 뜻을 가진 한자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한글과 함께 한자를 함께 기록하는게 보통이라고 생각한다.
파과(破果), 아니면 파과(破瓜) 인지...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을 찾아보니 흠있는 과일인 破果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책에 나오는 썩은 복숭아 이야기도 나오고...
어딘가 찾아보면 왜 구병모 작가가 제목을 '파과'라고 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한 부분을 찾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파과'의 단어 중에 과(果,瓜)가 두 가지로 나누어 볼때 열매 과(果)가 아닌 오이과(瓜)의 한자에 나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과(瓜)에 여덟이라는 팔(八)이라는 숫자가 두번 들어간 한자라고 한다.
이걸 16세, 아니면 64세 로 해석하여 단어가 쓰여지고 있었다.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노년의 이루는 조각의 삶의 시간속에 변화를 거부하면서도 변화되어 지는 조각의 모습을
나타내고 싶은 건 아닐까?
마지막 장을 넘긴 오늘 하루 정도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내 머리속에서 구병모 작가가 아닌 내가 소설을 쓰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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